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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칼럼_열 번 째 이야기]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을 지나며 돌아본 부모와 교사의 자리 by 스토리헤롯 강남점작성일 : 26.05.16

어버이날에는 부모의 사랑을 생각하고, 스승의 날에는 교사의 헌신을 생각한다.

부모로서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교사로서 아이를 잘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 어른은 아이에게 어디까지 알려주고, 어디서 멈추어야 할까.

부모이자 교육자로 살아오면서 나 또한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성장한 아이를 보며 드는 생각은,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간섭도, 더 빠른 해결도, 더 보기 좋은 결과만도 아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어른으로서 내 불안을 아이에게 쏟아내지 않고, 아이의 미숙함을 성급히 낙인찍지 않으며, 아이가 관계 속에서 잘 자랄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어른이다.

얼마 전 신입사원의 어머니가 회사에 직접 찾아가 자녀의 연봉이 스펙에 비해 낮다고 항의했다는 사연이 보도되었다. 그 어머니는 연봉계약서를 함께 검토하겠다며 회사에 찾아왔고, 자녀의 스펙에 비해 연봉이 낮다고 항의했다고 한다.
또 대학생 자녀를 둔 부모가 학교에 전화해 성적에 항의하거나 수강신청 등 학교생활 문제에 개입하는 사례도 대학 현장에서 흔히 들리는 말이 되었다. 이런 사례들은 단순히 극성 부모의 이야기이거나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그 안에는 우리 시대의 양육과 교육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 담겨 있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어른이 너무 앞설 때, 아이는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자리를 잃게 될 수 있다.
아이를 위한다는 마음이 때로는 아이의 성장을 가로막고, 내 아이를 지킨다는 마음이 때로는 다른 아이와 공동체에 상처를 준다.

1. 부모의 과도한 불안이 아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아이보다 먼저 나서게 한다
부모가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은 당연하다.
아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뒤처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부모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걱정이 너무 커지면 부모는 아이보다 먼저 화내고, 아이보다 먼저 판단하고, 아이보다 먼저 움직이게 된다.
아이가 말하기도 전에 부모가 대신 말하고, 아이가 해결해보기도 전에 부모가 먼저 개입한다.
아이가 관계 속에서 배워야 할 작은 시행착오마저 부모가 대신 제거해버린다.
상담 현장에는 마음 아픈 사례들이 많이 있다.
아이들끼리 작은 다툼이 있었는데, 한 보호자가 상대 아이가 다니는 학원까지 찾아가 그 아이를 직접 꾸짖어 아이가 놀라 울고, 이후 학원에 가기 싫어하고, 어른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또 어떤 경우에는 엄마들끼리 잘 지내다가도 한 아이의 문제를 두고 특정 엄마를 배제하고, 모임에서 제외시키고, 결국 그 가정이 전학까지 고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등등

이때 상처받는 사람은 아이 한 명이 아니다.
내 아이도 다치고, 상대 아이도 다치고, 부모들 사이의 관계도 무너지고, 아이들이 속한 공동체 전체가 불안해진다.
“우리 아이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곧 “상대 아이를 공격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내 아이가 속상했다고 해서 다른 아이에게 어른이 직접 찾아가 위압감을 주거나, 다른 부모를 몰아세우거나, 아이들 사이에 편을 가르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어른이라는 힘을 앞세우는 일이다.
아이들은 그런 어른의 모습을 보고 배운다.
불편하면 말로 풀기보다 힘 있는 사람을 동원하는 법을 배운다.
마음에 안 드는 친구는 이해하거나 조율하기보다 배제하는 법을 배운다.
내 감정이 상하면 상대도 상처받아도 된다고 배운다.
어른이 누군가를 밀어내면, 아이도 친구를 밀어내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익힌다.

아이들 사이의 갈등은 대부분 미성숙한 마음이 서로 부딪히는 과정이다.
아이들은 아직 자기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키워가는 중이고, 친구입장을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그래서 다툼도 생기고, 오해도 생기고, 서운함도 생긴다. 하지만 그 과정은 동시에 관계를 배우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른이 너무 빨리, 너무 강하게, 너무 어른의 시각으로 개입하면 아이들의 갈등은 더 이상 아이들에게 배움이 되지 못한다.
작은 오해가 어른들의 싸움이 되고, 아이들의 말실수가 가정 간 갈등이 되고, 친구 사이의 서운함이 집단 배제로 번진다.

좋은 어른은 아이의 말을 무조건 의심하지도 않지만 무조건 믿지도 않는다. 먼저 듣고, 확인하고, 기다린다.
“그랬구나, 속상했겠다”라고 아이의 마음을 받아주되, 곧바로 “그 아이 나쁘다”로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그때 너는 어떻게 말했니?”
“친구는 왜 그렇게 했을까?”
“네가 속상했던 것처럼, 그 친구도 속상한 부분이 있었을까?”
“다음에는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이러한 질문들이 아이를 성장시킨다.
반대로 어른이 대신 화내고, 대신 찾아가고, 대신 싸워주면 아이는 순간적으로는 보호받는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멀리 보면 관계를 견디고 문제를 해결해가는 힘을 키우지 못한다.
특히 아이가 어릴수록 우리는 더 조심해야 한다.
어린아이의 행동은 아직 완성된 인격이 아니라, 발달 과정 중에 나타나는 미숙한 표현일 때가 많다.
충동적으로 말하고, 친구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서툴게 반응하는 일은 아이가 배워가는 과정에서 자주 보여지는 행동들이다.

그런데 어른이 그 한 장면만 보고 “저 아이는 나쁜 아이야”, “문제 있는 아이야”, “가까이하지 마”라고 낙인을 찍어버리면, 아이는 고쳐야 할 행동을 배울 기회를 잃고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상처를 입는다.
적어도 어릴 때는 아이를 너무 빨리 규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떤 아이도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다툼, 한 번의 미숙한 행동만으로 ‘나쁜 아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 아이가 아직 자라고 있는 존재이듯, 다른 아이도 아직 자라고 있는 존재다.
어른의 역할은 아이를 낙인찍는 것이 아니라, 행동은 바로잡되 아이의 가능성은 남겨두는 것이다.
“그 행동은 좋지 않았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 아이는 나쁜 아이야”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아이들 사이의 문제를 다루는 어른의 최소한의 품격이다.

2. 기관은 부모를 안심시키려다 아이 자체를 놓칠 수 있다
이 문제는 가정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교육기관과 교사도 같은 압력 속에 놓인다.
많은 기관은 부모의 만족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부모가 만족해야 아이가 기관을 계속 다니고, 부모가 안심해야 기관 운영도 안정된다. 그래서 기관은 부모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결과를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발표, 사진, 결과물, 영어 문장, 한글 진도, 작품, 영상, 행사. 부모 눈에 보이는 아웃풋이 아이보다 더 중요해진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아이 자체가 보이지 않을 때다.
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참여했는지, 어떤 부분에서 불안해했는지, 왜 집중하지 못했는지, 왜 친구와 부딪혔는지, 어떤 발달적 도움이 필요한지는 충분히 들여다보지 못한 채, 겉으로 보이는 결과만 중요하게 여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집단 전체의 좋은 결과를 위해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아이는 배제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다루기 어렵다고 느껴지는 아이, 속도가 느린 아이, 감정 표현이 큰 아이, 규칙을 아직 충분히 익히지 못한 아이를 “전체 흐름을 깨는 아이”로 여긴다.

그러나 아직 유아다. 이 아이들은 질서를 배워가는 과정에 있다.
기다리는 법, 나누는 법,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법, 규칙 안에서 움직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유아를 성인의 관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성인이 아니다. 유아다.
유아가 줄을 흐트러뜨렸다고 해서 사회성이 없는 아이로, 유아가 자기 차례를 기다리지 못했다고 해서 이기적인 아이로, 유아가 감정을 크게 표현했다고 해서 문제 있는 아이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발달을 잘 모르는 이들의 성급한 판단이다.

물론 어떤 아이에게는 기질적인 예민함이나 충동성이 있을 수 있고, 감각처리의 어려움이나 주의집중의 어려움, ADHD와 같은 신경발달적 특성이 함께 작용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바로 낙인찍을 것이 아니라 더욱 세심한 관찰과 이해를 필요로 한다. 아이의 행동을 단순히 “버릇없다”, “이기적이다”, “문제 있다”로 몰아가기보다, 그 행동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시간을 두고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많은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는 대집단 안에서는 교사가 한 아이 한 아이를 깊이 관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의 표정, 감정 변화, 관계의 미묘한 흐름, 반복되는 행동들을 맥락 속에서 조용히 들여다볼 시간과 여유가 없다.
그래서 더 필요한 것은 아이에 대한 성급한 판단이 아니라 세심한 관찰과 개입이다.
부모와 교사가 함께 아이의 모습을 나누고, 반복되는 어려움을 살피고, 필요한 경우 아이의 발달 상태를 점검하고 전문적인 도움으로 연결해 주는 것. 그것이 아이를 문제로 몰아가지 않는 좋은 어른의 역할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를 문제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차리는 것이다.
유아는 아직 마르지 않은 시멘트와 같다.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

좋은 교사는 아이를 조용히 줄 세우는 사람이 아니다. 아이가 왜 흐트러지는지를 보려는 사람이다.
좋은 기관은 다루기 쉬운 아이만 남기는 곳이 아니라, 조금 느리고 서툰 아이도 배움의 자리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돕는 곳이어야 한다.
교육은 아이를 선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바르게 자라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교사역할이 쉬운 것은 아니다. 한 명의 아이가 계속 힘들어해도 전체 아이들의 안전과 수업 흐름을 고려해야 하고, 다른 아이들의 권리도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교사는 아이의 행동을 단순히 방해로만 보지 않고, 그 행동 뒤에 있는 발달적 의미를 읽으려 해야 한다.
왜 이 아이는 기다리기 어려울까.
왜 이 아이는 자꾸 몸으로 먼저 표현할까.
왜 이 아이는 친구의 말을 공격으로 받아들일까.
왜 이 아이는 규칙을 잘 지키지 못하는 걸까.
아이를 이해하려는 시선을 잃는 순간, 교사는 더 이상 좋은 어른이 아니다.

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해 기관이 당장의 좋은 결과만 보여주면, 아이는 평가의 대상이 된다.
교사가 부모의 민원을 피하기 위해 다루기 쉬운 아이만 중심에 둘 때, 조금 어려운 아이는 공동체 밖으로 밀려난다.
부모의 불안과 결과 중심의 기관이 만나면, 아이는 제대로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아이에게 좋은 기관은 완벽한 결과물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을 정직하게 바라봐주는 곳이다. 아이가 잘하는 것만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아이가 어려워하는 부분도 함께 품고 지도하는 곳이다. 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이를 꾸미는 곳이 아니라, 부모와 함께 아이를 이해하려는 곳이다.

3. 아이는 좋은 어른의 태도를 보고 자란다
부모들 사이의 관계도 아이에게는 교육이 된다.
엄마들이 친해지는 것은 좋다. 정보를 나누고 서로 의지하는 관계는 양육에 큰 힘이 된다. 그러나 그 관계가 어느 순간 힘의 구조가 되고, 누군가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용하게 되면 아이들에게 위험한 교육이 된다.
엄마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은근한 따돌림, 소문, 편 가르기는 아이들의 세계로 그대로 흘러 들어간다.
아이들은 어른의 말을 듣고 자라지만, 사실은 어른의 태도를 보고 더 깊이 배운다.

어른이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면 아이도 친구를 쉽게 평가한다.
어른이 누군가를 배제하면 아이도 배제를 배운다.
어른이 불편한 관계를 대화가 아니라 공격으로 해결하면 아이도 그렇게 배운다.
어른이 내 아이만 중요하다고 행동하면 아이 역시 “나만 중요하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세상은 내 아이만 사는 곳이 아니다.
내 아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아이도 누군가의 귀한 아이다. 내 아이의 마음이 다치면 아픈 것처럼, 다른 아이의 마음도 다치면 아프다. 이것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사람이 바로 좋은 어른이다.
물론 부모나 교사가 개입해야 할 때도 있다.
지속적인 괴롭힘, 폭력, 따돌림, 명백한 안전 문제라면 어른은 반드시 나서야 한다. 그러나 그때에도 방법이 중요하다.
상대 아이를 직접 찾아가 혼내는 방법이 아니라, 교사와 기관을 통해 사실을 확인하고, 공식적인 절차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아이들 문제를 어른의 감정싸움으로 키우지 않는 것도 좋은 어른의 태도이다.
좋은 어른은 아이가 전혀 상처받지 않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세상은 없다.

사실 우리 어른들도 상처 없이 살아오지 않았다. 관계 속에서 오해받고, 서운함을 느끼고, 때로는 억울함을 견디며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상처없는 삶이 아니라, 상처를 어떻게 이해하고 회복해가는지를 배우는 삶이다.
좋은 어른은 아이가 상처를 경험했을 때 그것을 미움, 배제, 공격성으로 표현되지 않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아이가 억울함을 느꼈을 때 상대를 무너뜨리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말하고 관계를 조정하는 방식을 배우게 하는 사람이다.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 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이 편이 되어주는 것은 아이의 미성숙함까지 모두 편들어주라는 의미는 아니다.
아이가 자기 감정을 이해하되 타인의 감정도 볼 수 있게 돕는 것, 아이가 자기 권리를 말하되 타인의 권리도 해치지 않게 가르치는 것, 아이가 억울함을 표현하되 공동체 안에서 해결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아이 편이 되는 일이다.

어버이 날과 스승의 날을 지나며 부모와 교사의 역할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인 동시에, 아이에게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첫 어른이다.
부모가 불안을 조절하지 못하면 아이는 세상을 불안한 곳으로 배운다.
부모가 관계를 공격으로 풀면 아이는 갈등을 공격으로 배운다.
부모가 아이 대신 모든 것을 해결하면 아이는 자기 삶을 감당하는 힘을 배우지 못한다.
교사는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인 동시에, 아이 앞에서 어른의 태도를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아이가 실수했을 때 어떻게 바라보는지, 아이가 느릴 때 어떻게 기다리는지, 아이가 힘들 때 어떻게 도와주는지, 아이가 친구와 부딪힐 때 어떻게 중재하는지, 그 모든 장면이 교육이다.

가정에는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부모가 필요하고, 기관에는 발달을 이해하는 교사가 필요하고, 공동체에는 어린 아이를 낙인찍지 않는 어른들이 필요하다.
아이를 지켜준다는 것이 다른 아이를 울리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를 교육한다는 것이 힘든 아이를 밀어내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이 아이 대신 세상과 싸워주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을 지나며, 다시 나에게도 묻는다.
나는 아이 앞에서 어떤 어른인가.
우리 기관은 아이에게 어떤 어른의 공간인가.
우리 사회는 아이에게 좋은 어른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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